
글쓰기에 대한 의심의 여지없는 타당성
마음속에 "글을 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하나쯤 품고 사시나요? 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하면서, 현실의 이것저것, 혹은 쓰고 싶다는 욕망마저 넘어서는 나태함과 편안한 안주(安住)로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일상 속에서 독서동아리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선정되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을 더 알아야 더 깊이 이해할 것 같아 고민하던 중에, 지인으로부터 작가의 자전적 수필 『문맹』을 추천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얇은 책이 저에게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글쓰기가 한 인간의 '존재 자체'일 수 있다는 강렬하고 숙연한 울림 같은 것.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 것은 한참 후, 어린 시절을 감싸던 은銀실이 끊어지고, 불행한 날들이 찾아오고, 내가 “그때는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그런 시절이 도래했을 때의 일이다.
『문맹』본문 中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문맹』본문 中에서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문맹』본문 中에서
이 책을 읽으며 저는 글을 쓰지 않으면서도 갈망했던 제 글쓰기의 울렁증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과연 저렇게까지 글쓰기에 대해 치열할 수 있을까?'라는 날 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한 인간을 이토록 치명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일까요? 저는 난민의 삶이 어떤 것이지 잘 몰랐습니다. 따라서 이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그녀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잔혹하고 서글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난민이 된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한 인간이 감당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모국어를 잃은 난민의 삶, '문맹'이 된 사막의 시간

『문맹』은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어린 시절부터 읽기와 쓰기에 남달리 몰두했던 시기의 일화로 시작합니다. 이후 헝가리의 정치적 혼란으로 국경을 넘은 그녀는 난민이 되고, 이 과정에서 모국어를 잃고 문맹이 됩니다. 이 책에는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적국(敵國)의 언어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마침내 작가가 되기까지의 치열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헝가리에 내 비밀 작문 노트뿐만 아니라 처음 쓴 시들도 놓고 왔다. 나는 그곳에 나의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미리 알려주지도 못하고 잘 있으라거나 또 보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두고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1956년 11월 말의 어느 날, 나는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문맹』본문 中에서
스위스 뇌샤텔로 배정된 그녀는 그곳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말은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읽고 쓰는 행위는 할 수 없는 자신을 스스로 '문맹(文盲)'이라고 정의합니다. 읽고 쓰는 것이 존재의 전부인 사람에게, 모국어를 잃은 낯선 땅에서의 삶은 영혼을 잃은 사막과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문맹』본문 中에서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문맹』본문 中에서
이 극한의 결핍 속에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언어를 다시 배우고,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되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사막에 뿌리를 둔 선인장처럼 단단하고 허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문학이라는 영혼의 꽃을 피워냅니다.
최소한의 언어, 최대한의 고백
『문맹』은 무척 얇은 책입니다. 불필요한 수식이나 미사여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언어로 글을 쓰려면, 그만큼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이 지극히 사실적이고 직설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녀는 일하는 틈틈이, 집안일을 마친 후 밤늦은 시간에 밀도 높은 글을 촘촘히 써 나갑니다. 그렇게 쓰인 글을 어디에 보내야 할지, 세상과 어떻게 만나게 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글을 씁니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문맹』본문 中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잊지 않은 건 단 하나였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라는 당위(當爲). 이 당위가 그녀 자신과 고향에 두고 온 그리운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녀의 글쓰기는 단순한 취미나 자기표현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그녀 자신이었고, 망명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시간을 되찾아오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는 소설가 백수린입니다. 이 책의 백미 중 또 하나는 옮긴이의 말입니다.
결국 그녀는 외국어, 그러니까 그녀의 용어를 빌면 “적의 언어”를 배워나가며 서서히 잃었던 자아를 되찾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문맹》은 독서와 서사를 사랑했던 한 여자아이가 작가가 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사회적,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정체성을 상실한 한 인간이 언어를 배우며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이야기인 셈이다.
『문맹』옮긴이의 말 中에서
글쓰기의 미망에 빠진 당신에게 건네는 단단한 울림
『문맹』을 읽으며 글을 쓰고 싶다고 느끼면서 뚜렷한 이유 없이 미루기만 하는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저처럼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 자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시는 분들에게 저는 이 책이 글쓰기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하는 동기가 될 것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환경이 아닌 '글을 써야만 하는 당위'로 태어난다는 진실을 말이죠.
만약 독자분 중에 글쓰기가 실천 없는 미망으로 느껴진다면, 이 얇고 단단한 책을 통해 그 글쓰기의 진짜 본질을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문맹』 추천합니다.
- 글쓰기를 '취미'가 아닌 '존재 양식'으로 인식하고 싶은 분.
- 글쓰기를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원적인 행위로 삼고 싶은 분에게 추천합니다.
- 완벽주의 때문에 글을 시작하지 못하는 분.
-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좋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날것 자체로 담아내는 용기를 얻고 싶은 분이라면 읽어보세요.
-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글쓰기를 미루는 분.
- 극한의 결핍 속에서도 글을 놓지 않은 작가를 보며, 스스로에게 가장 냉정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분들에게 권합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뷰 : 직접 읽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서사의 전복,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혼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뷰 : 직접 읽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서사의 전복, 아고타 크리스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전쟁과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파편화된 자아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지, 그 혼란을 독자가 직접 체험하도록 아고타 크리스토
innerpeace.tistory.com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 나는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 나는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읽고 간단한 줄거리와 주요 인물인 니나와 슈타인, 마르그레트 부슈만의 상징성 그리고 여성 실존주의 특징과 현대 독자가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 정리해 보았
innerpeace.tistory.com
[에세이 쓰는 법] 글쓰기, 왜 늘 작심삼일일까요? 평생 루틴으로 만드는 3가지 방법(7차시)
[에세이 쓰는 법] 글쓰기, 왜 늘 작심삼일일까요? 평생 루틴으로 만드는 3가지 방법(7차시)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싶은데 왜 늘 작심삼일로 끝날까?" 글을 쓰고 싶은데, 마음속에 작품 하나는 품고 사는 것 같은데, 그래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손이 멈추
innerpeace.tistory.com
꾸준한 글쓰기 노하우 시리즈 #1: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
꾸준한 글쓰기 노하우 시리즈 #1: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
목 차1. 강의 기본 정보2. 6 챕터 강의, 구성 내용 3. 프롤로그 요약 : 강사님이 꾸준히 쓸 수 있었던 비결4. Chapter 1-1 요약 : 글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5.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 가
innerpeace.tistory.com
포천면암도서관 '길 위에 인문학' 체험 : 마크 로스코, 나혜석 등 화가 삶과 그림으로 매마른 영혼에 단비를 내려준 아름다운 프로그램
포천면암도서관 '길 위에 인문학' 체험 : 마크 로스코, 나혜석 등 화가 삶과 그림으로 영혼에 단
오랜만에 영혼을 울리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마크 로스코, 나혜석, 박수근, 장욱진 같은 거장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림을 감상하는 '그림을 삶, 삶을 그림' 강좌였고. 마지막 주에는 국립현대미술
innerpeace.tistory.com
'책갈피 속의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시류 문학'이라는 나의 편견을 깨부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선택으로써 고통 (1) | 2025.11.10 |
|---|---|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뷰 : 직접 읽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서사의 전복,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혼란 (4) | 2025.10.22 |
| 『페인트』 엄마가 읽은 청소년 소설 리뷰 : 당신은 ‘성장하는’ 부모입니까? (2) | 2025.09.22 |
| 《착한 소비는 없다》 서평 | 똑똑한 소비가 필요한 이유 (0) | 2025.09.11 |
|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 나는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0) | 202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