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전쟁과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파편화된 자아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지,
그 혼란을 독자가 직접 체험하도록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탁월하게 설계한 서사 실험이다.
1. 이 책을 다시 펼친 이유: 게으름 ‘덕’에 체험한 거짓 같은 진실 혹은 진실 같은 거짓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꽤 유명한 책입니다. 이 유명세 때문인지 몇 년 전에 구매해 읽었는데, 1부를 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숙제처럼 남겨놓았었습니다. 그러다 독서 동아리에 읽을 책 추천을 할 기회가 있어 냉큼 이 책을 추천했고, 이번에 마침내 완독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게으름 '덕'에 이 책에 대한 해설이나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 처음에는 시대 배경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같은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읽고, 그녀가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와 그로 인해 겪게 된 개인적 체험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배경만 알고 작품에 관한 해설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을 때의 혼란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며,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을 펼쳤을 때의 혼란스러움은... 작가가 자신의 겪은 전쟁의 상흔, 인간성, 존재 증명, 체제의 부조리, 정체성 혼란 등을 독자가 고스란히 느끼도록 의도한 이 책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유명한 이 책이 어렵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문체가 술술 읽혀 난이도가 낮다고 혼자 착각했던 제가 부끄러울 정도로, 이 독서는 평범하지 않은 경험이었고, 읽고 난 후의 뭔가 멘붕의 소용돌이 또한 어마어마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혼란의 과정'에 따라 제가 겪은 서사의 붕괴를 차분하게 정리해볼까 합니다.
2. 1부 『비밀 노트』: 작가에 의해 구조화된 '견고한 진실'

1부의 세계는 평범한 소설처럼 읽힙니다. 가장 큰 특징은 단연 문체입니다. 그 배경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태생의 망명 작가이고 뒤늦게 배운 프랑스어로 글을 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자신의 쓰고자 한 핵심만을 썼기 때문에 쉽게 읽힙니다. 더불어 밀란 쿤데라에 비견되는 위트와 유머가 책 전반에 깔려 있어 어려움 없이 오히려 재미있게 읽힙니다.
하지만 그 재미 속에 담겨 있는 전시라는 시간적 배경과 국경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서 자라게 된 쌍둥이 형제의 의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전혀 다르게 움직입니다. 이들의 사고와 의식은 이 형제가 쓰는 '큰 노트'라는 기록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소년들은 오직 보고 듣고 행한 일만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엄격한 규칙을 세웁니다. 감정적 묘사는 완벽하게 배제된, 극도로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말입니다.
- 서사적 특징: 이 노트는 전쟁의 폭력성 속에서 인간성 상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는 잔혹한 현실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독자는 이 '감정 없는 기록'을 가장 순수한 진실이라고 믿으며, 1부의 서사(쌍둥이의 존재, 생존 방식, 국경을 넘은 한 명과 남은 한 명)를 소설이라는 가상 세계의 견고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이토록 신뢰할 수 있는 '진술의 형식'을 구축함으로써, 그녀의 의도에 따라 견고하게 형성된 소설의 서사 속으로 독자를 깊숙이 끌려들입니다.
3. 2부 『타인의 증거』: 균열의 시작과 시대의 트라우마
1부에 견고하게 구축된 세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1부는 마치 2부에서 미묘하게 균열이 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2부 자체의 서사와 인물들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도 체제의 부조리와 암울을 문학적으로 전달하지만, 1부에 이어 2부가 주는 소설 구조의 전복은 독자로 하여금 이전의 독서에서 갖지 못했던 불안감을 제공합니다. '나는 지금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불신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 역시 그녀가 망명 작가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에 언급한 바에 따라, 그녀가 적국의 언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영어권 나라에 머물다 보면 내가 말하는 것이 제대로 전달이 된 것인지, 상대가 말하는 것을 나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지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 불신의 벽에 놓입니다. 작가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자신의 언어가 가닿은 것에 대해 가질 그 불확실성을 독자는 2부를 읽으며 '나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확실치 않은 불안'으로 읽어 나가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의식의 혼란이 가능할까요.
여기서 독자는 미묘하나 결정적인 혼란과 마주합니다.
왜 루카스의 주변 인물들은 클라우스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2부는 1부의 끝에서 국경을 넘지 않고 홀로 남은 루카스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시대적 배경은 전쟁 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선 헝가리로 추정됩니다.
루카스가 잃어버린 형제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는 과정이 되지만,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루카스의 주장은 '혼자만의 외로운 주장'처럼 느껴집니다. 독자는 1부에서 확신했던 쌍둥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되며, 1부의 서사가 허구일 수 있다는 미묘한 균열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2부는 루카스 주변의 황폐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통해 전쟁 후 사회 체제 속에서 파괴된 개인의 삶과 정체성을 조명합니다. 2부는 단순히 줄거리의 연속이 아니라, 한 개인의 상실감이 시대적 트라우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4. 3부 『세 번째 거짓말』: 서사의 전복, 메타픽션과 작가의 정체성 혼란 체험하기

이 작품은 1부의 견고함, 2부의 미세한 균열, 3부에서는 근원적인 파괴가 진행됩니다.
이 단계에서 이 작품의 문학적 본질인 메타픽션(Metafiction)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메타픽션은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이야기 자체가 스스로 허구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기법입니다. 즉, 작가가 독자에게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라고 속삭이며 서사의 진실성을 의도적으로 뒤흔드는 장치입니다.
마지막 3부에서 작가는 1부와 2부의 서사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견고하게 구축한 세계의 진실성을 완전히 해체하는 경험을 합니다.
타국에 있던 인물이 50세가 되어 클라우스의 이름으로 귀국합니다. 이 클라우스라는 인물은 자신의 형제인 클라우스를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국경을 넘었던 루카스는 자신의 분신과 다름 없던 클라우스를 잊지 않기 위해, 어쩌면 분리를 방어하기 위해 클라우스의 이름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되었던 루카스는 자신이 루카스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짜 클라우스는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여러 사정으로 루카스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클라우스로 살던 루카스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알아보지만 루카스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클라우스에 의해서도 부정당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간에 써 왔던 진실의 고백이라 여겼던 노트를 본국에 남아 있던 자신의 분신과 같은 클라우스에게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진짜 루카스'를 찾는다는 서사는, 결국 1, 2부의 모든 이야기가 루카스(혹은 클라우스)라는 한 인물이 자신의 분열된 자아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쓴 허구의 이야기, 즉 '회고록 형태의 소설'일 수 있다는 암시를 던집니다.
인물의 혼란과 작가의 정체성의 혼란을 독자가 함께 겪는 진귀한 경험.
저는 이 책의 최고 가치는, 독자로서 작가의 실험 예술, 행위 예술에 직접 참여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클라우스'와 '루카스'라는 두 개의 이름, 그리고 '노트'라는 기록 매체는 결국 전쟁이라는 극한의 트라우마가 낳은 파편화된 자아를 기록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작가는 독자 스스로 진실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게 하면서, 트라우마를 겪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창조하는지를 직접 체험하는 작법은 훌륭하게 구사합니다. 이는 말로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직접 읽은 독자만이 경험하는 경지였습니다.
5. 맺음말: 진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책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은 "무엇이 진실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겪은 정체성의 혼란, 언어 장벽의 불확실성 등 역사적 폭력과 언어를 잃은 사람의 불안이라는 두 축 위에서 탄생했습니다.
- 역사적 혼란 (내용적 근원): 전쟁과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역사는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조작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작가에게 역사적 사실(Fact)마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서사(Narrative) 일뿐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더불어 이는 작가가 경험한 혼란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의 분열과 존재의 불가지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언어적 불확실성 (형식적 근원):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쓰면서, 감정 묘사를 배제하고 극도로 건조한 문체를 사용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감정 없는 객관적 기록'의 형식은 진실성의 진수만을 기록하고자 한 고도의 노력이지만, 이것은 타국의 언어가 가진 숙명처럼 제대로 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잠들고 마는 형국이 됩니다.
결국,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진실이 역사나 언어라는 외부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 개인의 내면에서 오롯이 믿고 선택해야 하는 영역임을 보여줍니다. 이 책이 저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우리가 삶에서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 아닐까,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합니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문학을 심리·철학적으로 깊게 탐구하는 독서 경험을 원하는 분
- 혼란스럽고도 아름다운 문체 속에서 ‘인간의 복잡성’을 느끼고 싶은 분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끌리는 분
‘글을 쓴다’는 당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에세이 『문맹』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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