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장소를 넘어선 나의 자리, 내 정체성의 공간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집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독서동아리에서 선정된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책도 작가도 제게 꽤 낯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집에 대한 따뜻한 교감이나 추억을 다룬 에세이쯤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이 책이 담고 있는 집과 작가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훨씬 깊고 다채로웠습니다. 이 책은 집을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정서적, 공간적, 위치적 의미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집에 관한 특별한 책이었습니다.
집, 그 이상의 의미: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존재론적 담론
이 책은 '집'이라는 PLACE, 장소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정치적 젠더가 내포된 공간, 한 주체가 '자리'하는 공간, 그리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려는 주체적 존재론까지 사유 깊은 통찰을 풀어냅니다. 작가는 자신이 생애 주기별로 거주했던 다양한 집들을 통해 불안했던 시절의 상처, 성장, 그리고 변화했던 삶의 궤적을 차근차근 풀어나갑니다. 단순히 '어디에 살았다'는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서 '나'라는 주체를 어떻게 형성해 나갔는지의 경험을 진솔하고 차분하게 서술해 나갑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작가가 집을 따라 이동하며 겪었던 경험들이 하나의 서사로서의 집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책 소개를 보니 이를 다른 표현으로 '시절'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집은 단순히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을 품어내고 치유하며 성장시키며 존재하게 하는 심층적인 공간임을 알게 해 줍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 '나의' 공간, 집이 담아낸 시절과 함께 나는 존재한다!!
책의 제목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친애하다'는 '친밀히 사랑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자신만의 내밀한 우주이자 애착의 대상입니다. 책의 목차를 빌려보면 작가의 생애를 따라 화려했던 시절, 집의 계급적 의미를 어렴풋이 인식했던 시절, 작아지는 집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시절, 서울로 와 문학을 공부하며 불안한 자아와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상인 동네를 전전하던 시절,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고 지탱하기 위해 감당했던 시절 등 집다운 집, 자기 다운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집을 꾸미고 안착할 공간에서 자신의 자리를 인정받고 부여받는 과정을 보면 문득 나로 존재하는 일이란 결국 이와 같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작가가 이사 첫 관문을 항상 자신에게 맞게 실내를 재구성하는 모습은 집이 그녀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집이라는 공간은 타인과의 정서적 공감의 장소가 되면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오롯이 홀로 버티고 독립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견고한 성채가 되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올곧이 떠안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작가 하재영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작가 하재영님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습니다. 저는 '자기만의 집',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을 탐구하고 찾아가는 하재영 작가의 모습에서 서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스스로를 에밀리 디킨슨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자기만의 방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버지니아 울프를 언급하지만 나는 얼마 전에 읽은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떠올렸다. 그는 1830년에서 1886년까지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메인 스트리트 208번지 2층의 모퉁이 방에 살았다. 조카인 마사의 증언에 따르면 디킨슨은 그 방에 처음 왔을 때 열쇠를 돌려 방문을 잠그는 시늉을 하며 "매티, 이제 자유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에밀리 디킨슨이 평생을 보낸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의 2층 모퉁이 방에서 "매티, 이제 자유야"라고 말했던 일화는 작가가 집을 바라보는 관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내포된 젠더의 개념 집이자, 심리적, 정서적 측면이 모두 각인된 의미의 공간인 것입니다.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물리적, 경제적 독립을 통한 글쓰기의 자유를 강조한다면, 디킨슨과 하재영 작가의 '집'은 그 내면의 공간에서 온전한 자아를 찾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집,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단순한 추억 돋는 감성 에세이가 아니었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는 에세이는 집에서 살고 경험하고 사유하는 집에 관한 담론입니다. 집이라는 하나의 글감에 내포된 깊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준 작품입니다. 집이라는 주제 안에 우리 사회와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섹션들이 씨줄과 날실처럼 교차하며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책을 읽고 저 또한 나의 공간과 집, 나의 자리와 존재라는 화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자리, 장소와 일치하는 삶'이란 얼마나 단단하고 견고할까요? 이 질문은 앞으로 제가 살아가면서 설 곳을 잃고 방향감을 상실할 때마다 내 생활과 일상을 돌아보고 자리를 잡아가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 같습니다.
2025.07.24 - [가만히 쓴다] - 대단한 인생이어야만 할까, 아니면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대단한 인생이어야만 할까, 아니면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HBO 드라마 의 명대사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 평범한 일상 속 깨달음나이가 들고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innerpeace.tistory.com
2025.07.20 - [책갈피 속의 나] - [세계문학]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던지는 질문
[세계문학]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던지는 질문
1. 찰나의 비극, 영원한 질문 18세기 페루,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집니다. 이 다리는 백 년도 더 전에 잉카인들이 얇은 판자 위에 마른 포도덩굴 난간을 달아 놓은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다
innerpeace.tistory.com
2025.07.25 - [천천히 배우는 시간] - [글쓰기 강의] 경기도 지식 GSEEK : [독서포인트] 오늘부터 시작하는 일상 글쓰기_2차시 요약
[글쓰기 강의] 경기도 지식 GSEEK : [독서포인트] 오늘부터 시작하는 일상 글쓰기_2차시 요약
일상에서 글쓰기 2차시: 사소한 내 일상도 에세이가 될까요?(feat. 기록 습관의 중요성)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에세이가 될 수 있을까요? 경기 지식사이트 '[독서포인트] 오늘부터
innerpeace.tistory.com
'책갈피 속의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페인트』 엄마가 읽은 청소년 소설 리뷰 : 당신은 ‘성장하는’ 부모입니까? (2) | 2025.09.22 |
|---|---|
| 《착한 소비는 없다》 서평 | 똑똑한 소비가 필요한 이유 (0) | 2025.09.11 |
|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 나는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0) | 2025.09.06 |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관계에 관한 기묘하고 섬세한 미시적 포착(소설 추천) (5) | 2025.08.08 |
|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책 리뷰 : 어느 날 내게 닥친 사고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0) | 2025.07.20 |